사람, 사람을 바라보다

성석제 작가

성석제 작가 사진

인간의 숲에서
문학의 나무를 보다

성석제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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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누가 시간의 주인인가?

    우리나라 사람들은 상당히 자유로운 사고, 가치관, 요령 같은 것을 가지고 있죠. 자기에게 이익이 되도록 조절하는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아는 어떤 분이 대학 교수인데, 일본의 어느 대학과 자매결연을 맺었습니다, 1년에 한 번씩 교류를 하기로 했지요. 일본에서는 공항부터 대학, 숙소, 행사가 벌어지는 모든 곳까지, 그야말로 1분1초가 완벽하게 동선을 다 짜 놨습니다. 공항에서 지하철표를 나눠주는 것부터, 행사장에서 식당까지 거리가 얼마고, 식사가 뭐가 나오고, 그걸 먹는 것까지 거의 다 계산을 했습니다, 그 후에 차를 마시고, 환담을 나누고, 이동해서 세미나를 하는 것까지, 그렇게 한국 분들이 대접을 잘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 분들이 걱정이 되는 거죠, 내년에 저 사람들이 오면 어떻게 해야 하나.. 하지만 걱정만 했을 뿐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습니다. 한국사람들이니까요. 결국은 때가 되어서, 결국 그 분들이 오게 되었습니다. 시간은 용서가 없죠. 일단 학교까지 오는 데는 성공했습니다. 총장님하고 악수하는 식의 접견을 하고, 환담을 하는 일이 있었는데, 시간이 계속 늦어졌습니다, 1분씩, 또 1분씩, 1분씩 해서 그 짧은 일정에 10분씩이나 늦어졌습니다. 물론 한국 사람들은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그럴 수도 있지 머, 10분 정도야, 그렇게 생각했지요. 그런 식으로 시간이 계속 지연되었습니다, 그 때마다 일본 사람들은 몸짓과 언어로 미안함을 표시했습니다. 시간이 흘러서 저녁 때가 되었는데, 드디어 한 시간이 넘어갔습니다. 나눠준 쪽지에는 저녁 18시, 저녁 어디서 이렇게 되어 있는데, 6시 59분이 되어도 식사가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일본에서 온 여교수 한 분이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습니다. 말없이 눈물을 흘리면서 벽에 기대서 서 있었다고 합니다, 나머지 남자 교수들도 같이 울상을 하고 있었고요. 우리 한국인들은 그렇게 살지 않아야 되겠습니다.(웃음) 음… 여기도 한 가지 교훈이 있습니다. 누가 시간의 주인인가 하는 겁니다. 보잘것없는 소설가인 저도 이 우주에 한 번도 없었습니다, 혼자 단독자로 여기에 있고,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권리를 누구에게 양보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나 자신의 주인이고, 복제품이 아닌데, 단 한 번 밖에 없는 오리지널리티 그 자체가 나인데, 그것은 양보할 수 없는 천부적 권리이기도 하지요. 그게 아니라면 문학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문학이든 예술이든, 역사, 민주주의, 정치, 아무것도 의미가 없겠지요. 문학의 첫째 공부대상은 인간입니다. 원고료가 아니고요, 아쉽습니다.(웃음) 둘째도 인간입니다. 인간사, 그것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 문학하는 사람들이죠.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독자 역시 직접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살아볼 수가 없죠. 그래서 어떤 개연성, 허구에서 배우는 겁니다. 일종의 우회로라고나 할까요? 교과서에서는 1+1=2라고 가르칩니다. 2=1+1이 아닐까? 라고 생각하게 해 주는 것이 문학입니다. 그것이 예술이고, 그렇게 하는 아주 간단한 기술이, 동물과 거의 다를 게 없는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이죠.

  • 왜 공부를 할까?

    양하고 염소는 외양은 비슷해 보이지만 사자와 호랑이보다도 사이가 멀다고 합니다. 양과 염소 사이에 태어나는 새끼, 깁(geep)이 태어날 확률이, 사자와 호랑이 사이에 나은 새끼, 타이언이나 라이거가 태어날 확률보다 훨씬 낮습니다, 그만큼 사이가 멀기 때문에. 이런 걸 알아서 뭐에 쓰느냐고 물어볼 사람이 많습니다. 사실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는 것의 97% 이상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아무짝에도 쓸데 없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나머지 3%의 90% 이상이 불완전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럼 거의 대부분의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 지혜, 진리, 종교적 도그마, 정보, 학교에서 배우는 것의 태반이 쓸데없는 것들입니다. 그러면 왜 공부를 할까? 왜 우리는 쓸데없는 것들을 공부를 하면서 성장기를 보낼까? 어릴 때 저는 그런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나를 힘들게 하려고 공부를 시키는구나, 특히 수학공부를. 수학공부만 안 하면 좋겠다, 무협지나 봤음 좋겠다, 그런데 왜 공부를 시킬까? 나중에 약간 머리가 굵어서, 아마 이렇지 않았을까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인간이 좋아하든 싫어하든 인간한테 생소한 가치체계나 지식체계를 주입하면 그 문제를 풀기 위해서 여러 가지로 노력을 하게 됩니다, 안 풀면 패니까, 평판이 나쁘게 나오니까, 혼나거나, 밥을 못 먹거나 하니까, 인간은 그것을 해결하려고 노력을 하게 됩니다. 노력을 하게 되는 과정 끝에 우리 뇌 속에서 변화가 일어납니다. 한 번 변화가 일어나면 그건 비가역적 법칙이 작용이 됩니다, 그 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는 것이지요.

  • 왜 칸트를 이해할 수 없었을까?

    말 잘 하는 사람은 참 많습니다. 그런데 문장을 품위 있고, 고급스럽고, 모든 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쉽게, 명문을 쓰는 사람은 아주 드물지만, 적어도 알아 들을 수 있게 쓸 수 있는 사람도 상당히 귀합니다. 제가 대학 처음에 들어갔을 때, 대학생이 되었으니까 나도 이제 이 정도는 읽어야겠다 싶어서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이라는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첫 페이지를 읽는데 무슨 말인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되풀이해서 읽어 봤습니다, 써 보기도 하고요, 분명 이것은 한글로 되어 있는데 무슨 말인지를 모르겠어요. 그래서 칸트를 잠시 미뤄두고 프로이트를 읽기 시작했습니다, 『꿈의 해석』 같은 거요, 근데 이 역시 칸트나 비슷했습니다. 그 때 포기하면서 내린 결론이, 칸트나 프로이트를 번역하는 학자들은 정신병자거나, 자기가 아는 것을 남들이 모르게 하려고 쓴 것이 틀림없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다가 세월이 한참 흐른 뒤에 삼십 가까이 되어서 미국에서 공부하다 온 친구가 칸트 영문판을 들고 다니길래 점심시간에 칸트를 잠깐 보는데, 저의 숨을 막히게 했던 그 첫 페이지가 읽혀요, 이렇게 쉬웠나 하는 생각도 들고요. 이 친구에게 이런 뜻인가 라고 물어봤더니, ‘맞다’고 그래요. 내가 지금보다 한참 머리가 좋을 때도 무슨 뜻인지 몰랐는데 오늘은 왜 읽히지? 그 사이 영어 실력이 폭발적으로 늘었나? 결론은 무슨 뜻인지 모르는 사람이 그 책을 번역한 것입니다. 자기도 무슨 말인지 모르니까 자기가 아는 모든 실력을 최대한 동원해서 누가 말을 못 걸게 만든 것이죠. 불행하게도 그런 일들이 60년대와 70년대에 상당히 만연했습니다. 중요한 책들인데도요, 그래서 사람들이 아예 겁먹고 못 읽게 만든 책들이 많았습니다. 80년대 들어서면서, 좋은 번역자들과 공부를 많이 한 학자들이 등장해서, 아주 쉬운 문장으로 본인이 직접 쓰든, 번역을 하든 아주 쉽게 대중이 이해할 수 있는 책들을 내놓기 시작했습니다.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 같은 책이 있었지요. 그런 책은 30만권쯤 팔린 것 같은데요, 그 당시 독서대중을 생각하면 대부분의 웬만한 고등학생 이상은 읽었다는 얘기입니다. 그만큼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평이한 문장으로도 얼마든지 우주의 경이, 탄생, 별의 변화 과정, 무엇보다도 천문학에 대한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할 수 있는데 그 전에는 그러지 못했던 것이지요. 그만큼 문장, 책, 문학 이런 것들은 우리 삶을 결정적으로 좌우할 수가 있습니다.

  • 왜 재즈음악이 미국에서 지금처럼 사양길에 접어들었을까?

    저도 영화를 좋아해서 얼마 전에 돈을 내고 본 영화가 있어요, 「위플래쉬」라는 재즈 영화에요. 영화를 보다가 아주 인상적인 구절이 있었습니다. 메모해 둔 것이 안 찾아지는군요, 기억에 의존해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일부러 머리를 민 것 같은 선생이, 드럼 치는 제자를 갈구면서 "왜 미국에서 재즈음악이 지금처럼 사양화된 음악이 된 줄 아느냐? 왜 이렇게 쓰레기가 돼 가는 줄 아느냐? 더 이상 좋은 작품이 나오지 않는 지 아느냐?”고 묻습니다. 모르죠. 알 리가 없죠. 제자가 대답을 못 하고 있으니까 거기에 대한 대답이 이렇습니다. "스타벅스에서 흘러나오는 재즈음악 세트가 모든 것을 다 설명해 준다” 라고 이야기 합니다. 말하자면 이지 리스닝, 예술성을 상실하고, 전투력이 없는, 예술가가 심혼을 쏟아 내서 만든 음악이 아닌, 그냥 대충대충 듣고 흘러가는 그런 것들이 망쳐 놓는다. 수준을 낮은 수준으로 끌어내린다는 것이죠. 저도 고민이 그렇습니다. 내가 쓰는 작품이 내 윗대, 가령 천 년 전에 쓰여진 어떤 작품, 향가들, 그런 것들을 읽고 내가 감동한 그대로를 내 후대에게 물려줄 수가 있을까? 그것을 발전시키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 감동을 물려줄 수가 있을까? 그럴 때마다 반성을 하게 됩니다. 반성을 해도 별 소용은 없는데요.. 문학작품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너무 쉽게 쉽게,.. ‘아예 안 읽는 것보다는 읽는 게 낫다’는 논리도 있습니다, 맞는 말이에요. 하지만 한 사람이 자신이 갖고 있는 역량, 혹은 그 이상을 쏟아 부어서, 자기 자신이 갖고 있는 시간의 주인으로서 무엇인가를 만들어내는 것, 그것이 생명으로 태어난 이유가 아닐까? 그런 생각을 가끔 합니다,… 정말 가끔이요.(웃음)

  • 영상을 만드는 장르와 비교하여 소설만의 매력이 있다면 무엇이 있을까요?

    제가 신경생리학자는 아니지만, 근래에 관심이 생겨서 그런 쪽 책들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동영상, 주말에 하는 무슨 도전, 드라마, 토크쇼, 리얼리티 쇼를 보면서 우리 뇌는 쉰다고 합니다. 그것을 보는 것이 눈감고 잠 자는 것보다 우리 뇌가 쉬는 데 더 도움이 된다고 해요. 그러면 인간이 가장 각성된 상태는 언제인가? 물론 사람마다 다릅니다만, 인간에게 주어진 가장 뛰어난 의사소통 도구이면서, 지적인 도구, 그것이 언어인데요. 그 언어를 손으로 소리 내서 쓸 때입니다. 한 문장을 쓴다고 해 보지요. 우선 자기가 아는 단어를 생각해내야 하고요, 또 단어의 맥락이 맞게 만들어야 하고요, 그 문장이 다음 문장을 어떻게 끌어올 지도 생각해야 하고,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보일 지도 생각해야 합니다. 그런 활동을 하려면 머리 속의 뉴런들이 굉장히 활발히 움직이면서, 마치 백미터를 전력 질주하는 것 같은 운동 효과를 준다고 합니다. 부작용은, 다른 소설가를 굶어 죽게 만들 수 있다는 강력한 부작용이 있습니다.(웃음) 무엇을 쓰고 싶다, 표현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 그냥 쓰세요. 그것을 말로 그냥 친구와 이야기 할 수도 있습니다만, 하지만 문장으로 만들어 보는 것, 그것은 비가역적 현상을 우리에게 가져다 줄 겁니다. 아주 운이 좋으면 릴케를 만들어 줄 수도 있습니다.

  • 선생님에게 소설은 어떤 의미인지?

    저소설이 예전에는 그렇게 어렵게 생각되지 않았습니다. 저는 원래 시를 쓰다가 소설을 썼기 때문에요. 풀어 쓰는 시 같은 느낌? 시를 쓸 때도 이야기가 들어가는 경우는 많았으니까요. 그런데 시 청탁이 안 들어오니까, 시를 쓸 수 없게 되고 풀어 쓰는 시라는 느낌이 사라지니까, 뭔가 소설만을 위한 동기가 필요했습니다. 그 동기는 결국 제 피 속에 들어있는 농부 유전자 같은 것일 거에요. 일단 청탁이 들어오고, 청탁을 받아서 기간 내에 마쳐서 쓰는 것. 농사 질 때 중요한 것은, 누가 언제 논에 물을 넣고, 누가 언제 씨를 뿌리느냐입니다. 지금 논밭에 아무 것도 없는데도 눈치 작전에 들어가서, ‘언제 씨 뿌릴 거냐?’ ‘아, 내일.’ 그런데 안 뿌립니다. 언제 하냐에 따라서 이게 설 익을 수도 있고 너무 익을 수도 있습니다. 언제나 중간에 한 사람이 승자입니다. 근데 성질 급한 놈은 못 이기고, 에이씨 하고 뿌려버리고, 에이씨 하고 수확해 버리고 패자가 되어 버립니다. 어떤 의미에서, 농부들은 농사가 없더라도 협업을 하고 있습니다, 끊임없이 눈치 보고 그런 일들이 벌어지지요. 저도 아마 그런 것 같아요. 소설 안 쓸 때도 다니면서 뭔가 이야기를 듣고, 뭘 읽고, 요즘 경우는 읽는 것이 확실이 수확량이 많은 것 같아요. 책이 여전히 싸요, 회수율도 높고 해서 앞으로도 책을 좀 많이 활용해 보려고 하는데요. 그런 것처럼 책도 읽고, 돌아다니면서 이야기도 듣고, 들려오는 것도 있고요, 날씨도 경험하고, 울릉도도 가고, 그런 것을 계속 반복합니다. 그런 것이 언젠가는 소설을 쓰는 데 한 문장을 낳거나, 한 장면을 낳거나 그런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라고 믿으면서요. 이건 청탁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웃음)

  • 최근에 혹시 관심을 갖고 있는 분야가 있다면 알려주십시오

    요즘 울음에 대해서 관심이 있습니다. 어떤 상황이 사람을 울게 만드는가? 그런 게 재미있습니다. 웃음도 매우 복합적인 것이지만, 우연적인 경우가 많은데, 울음은 조금 더 동기가 강력하지요, 왜 우는가? 울음의 효과는 무엇인가? 예를 하나 들어 드리겠습니다. 제가 아는 어떤 사람이 주말마다 구간을 끊어서 백두 대간을 종주하는데, 가장 어렵다는 구간에 접어들었다고 합니다. 바위투성이에 길이 잘 안 되어 있습니다, 한 번 들어가면 다시 돌아 나오기도 어렵고요, 그야말로 악전고투하면서, 하나 넘으면 하나가 또 나오고 그랬다고 그래요. 너무 힘들어서, 죽어 버릴 지도 모르겠다는 두려움보다도, 힘든 게 더 강했습니다. 계속 가야 할까? 내가 왜 이런 데 와 있나? 하는 철학적인 질문에 이르고 난 뒤에, 울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소리 내서 엉엉 울었답니다. 나이가 50 다 된 남자가 엉엉 울면서 맹목적으로 길을 간 것이죠. 결국 길을 찾아서 내려 왔다고 그래요. 우는 동안에는 고통을 잊었다…고 그럽니다. 울음 소리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발견이 되었는 지도 모르죠.(웃음) 아, 우는 게 좋다. 울 때 우는 것이 좋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자리에서 실천을 한 번 해 볼까요?

  • 선생님 소설에는 평범한 사람, 평균보다 못 미치는 사람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인물에게 특별히 더 마음을 주시는 이유가 궁금합니다.

    글쎄요… 그런 사람들이 어릴 때부터 저랑 같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저는 어릴 때 굶었다거나, 혼이 많이 났다거나, 그렇게 불우하게 살지는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의 분위기, 제가 성장하던 시기의 분위기는 뭔가 암울하고 억압받고 힘들고 배고프고 그런 사람들이 주변에 워낙 널려 있었습니다, 그런 사람들하고 친했어요. 중학교 때, 황금 같은 시골에서 서울로 전학을 왔는데, 제가 친하게 지낸 사람들이 우리 집 지하 공장에서 일하던 형들이었습니다. 일하다가 힘들면 공장주가 약간의 시간을 줍니다, 그러면 옥상에 올라와서 고기를 구워 먹습니다. 저는 주인집 아들이에요, 저는 당연한 권리인양 고기를 얻어 먹었습니다, 형들이 귀엽다고 술도 한 잔 따라주고, 그러니까 친해질 수 밖에요. 그런 형들이 지하에 내려가면 아주 뜨거운 고열 속에서 플라스틱 같은 것을 붙이는 작업을 하고 있었는데 연기가 많이 납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하루 해는 너무 짧아요’라는 음악이 계속 반복해서 들려옵니다. 그렇게 일하다가 어쩌다가 일요일 같은 때, 백구두를 신고 잘 차려 입고 이성을 찾아서 한 마리 하이에나처럼 헤매다가 저녁이 되면 피투성이가 돼서 돌아옵니다. 그래서 약국 가서 약 사고… 통금이 있었지만 밤 12시가 넘어서도 약국에 약 사러 오는 사람 발길이 끊이지 않습니다. 급하게 뛰어오는 발걸음 소리, 문 두드리는 소리, 약사가 짜증내는 소리,.. 없는 동네에 또 도둑이 그렇게 많아서, 하루 한 번은 싸우게 됩니다, 서로 치고 받고 하다가, 그러면 또 약국 가야죠. … 그런 사람들을 보면 본능적으로 친구 같고 그렇습니다. 잘 살고 문제없는 사람들은 사실 쓸 게 없어요. 잘 살겠지 머 그걸로 끝입니다. 그런데 잘 살지 못하는 사람들은, 저 사람들은 왜 그렇지 못할까 하는 것부터 모든 게 궁금하고 가까이 가서 이야기를 하고 싶어집니다. 그렇게 못해서 문장으로라도, 소설로라도, 손을 잡고 끌어안고 싶어집니다. 그런 작업을 통해서 저 자신도 굉장히 많이 치유를 받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그 분들에게 늘 신세를 지고 있는 거죠, 그러니 그분들의 이야기를 쓸 수 밖에 없습니다.

사람, 이야기하다

사람과 삶을 둘러싼 스토리텔링

  • 인간의 숲에서 문학의 나무를 보다

    성석제 작가

  • 인간을 아는 세가지 방법

    김탁환 작가

김탁환 작가

김탁환작가의 사진

인간의 아는
세 가지 방법

김탁환 작가

  • 인간을 아는 세 가지 방법 1 사색, "나는 누구인가?"

    "소설 중에서 사사롭다는 뜻의 ‘사(私)’자를 쓰는 ‘사소설’은 많은 소설가들의 자기 고백인지, 허구인지 헷갈리게 자기 이야기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일본 소설의 한 형태입니다. ‘내가 갖고 있는 추악함, 또 아름다움은 어디까지 인가?’ 같은 자기 자신에 대한 공부인 셈이죠. 자기 자신에 대해 쓴다는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해 굉장히 정직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나를 계속 뚫어져라 들여다 보고 있으면, 자기 자신 속에서 인간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 인간을 아는 세 가지 방법 2 – 관찰, “(내 옆의) 너는 누구인가?”

    “(지금) 내 옆에 있는 사람 역시 인간입니다. 그 사람에 대해 계속 질문하고 왜 저렇게 사는지 따지다 보면 답이 나옵니다. <그의 슬픔과 기쁨>이라는 인터뷰집은 쌍용차 해고자 26명을 일일이 만나서 전부 인터뷰 한 건데, 100일에서 150일 정도를 이 사람들을 만났다고 할 수 있죠. (인터뷰집의) 목차를 보면, 보통은 나와 A, 나와 B같은 방식인데, 2009년, …2013년처럼 쌍용차와 이들이 싸운 5년 동안의 기간으로 되어 있어요. 먼저 다 인터뷰를 하고 펼쳐서 같은 시간과 장소에 인물을 다시 엮은 것이죠. 어떤 의도일까 물었더니, 한 명 한 명 인터뷰를 해서 정리를 하다 보니 결국 (모두가) 한 명 같더라는 겁니다. 그 기간 동안에 사람들이 계속 죽었는데... 사람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에서, 결국 그들이 죽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대단한 착상입니다. 읽어 보면 등장 인물들이 나오는 이야기들이 이어지는, 소설처럼 읽혀요. ‘너’에 대해서 아주 집요하게 들어가면 여기까지 할 수 있죠.”

  • 인간을 아는 세 가지 방법 3 – 독서, “(역사 속의) 그는 누구인가?”

    “내가 어떤 인물에 대해 굉장히 궁금할 때, 살아있는 사람이라면 직접 가서 만나면 되지만, 인간은 유한한 존재라, 유일하게 알 수 있는 방법은 책을 보는 것밖에 없어요. 소설가로서 ‘왜 하필 이 사람을 (선택)했나요?’ 라는 질문을 항상 받습니다. 내 머리로 이해가 되는 인물은 쓸 이유가 없죠. 가령 이순신과 같은, 99명의 장수가 다 질 동안 혼자만 계속 승리하는, 어떤 과정에서 그렇게 되었는지.. 내 머리로 이해가 안 되는 인물에 대해 공부해서 내 문장으로 쓰면서 왜 그 사람이 그런 행동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알고 싶은 것이죠. 또 하나는, 지금 내가 하는 고민과 맞닿아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나는 이런 고민을 하고 있는데, 이 사람은 이런 고민을 하지 않’으면 같이 글을 쓰기가 좀 어렵습니다. 장편 작가는 그래서 질문을 먼저 합니다. 그 질문이 무엇인가를 고민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전쟁과 평화>처럼 그 질문이 바로 그 책의 제목이 됩니다.”

  • 이순신, 정도전의 ‘결정적 하루’

    “소설가들이 그 인물의 삶을 다 쓸 수는 없으니, 많이 쓰는 방법은 그 인물의 삶 속에서 가장 중요한 하루를 보는 것입니다. n분의 1로 나누어 쓰는 것이 아니라, 가장 중요한 하루를 기준으로 앞과 뒤를 편집합니다. 그런데 그런 하루는 기록되기도 하고, 기록되지 않기도 해요. 대부분은 기록이 잘 안 되죠.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하루, 돌이켜 보건데 그 날이었어’ 같은 식입니다. 그런 날이 꼭 기록되는 것이 아닌데, 아주 가끔 그런 일들을 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승리한 날, 자기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날들을 더 길게 일기에 쓴 이순신 장군 같은. 정도전의 경우에는 1392년 4월 4일이 가장 핵심적인 날입니다. 정몽주가 죽을 때 정도전은 고향인 경상도 영주, 자기 집에서 놀고 있었어요.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날인데, 내가 모를 수도 있지 않을까. 이 틈을 써보고 싶었습니다. 개성에서 긴박하게 벌어지고 있는 하루, 영주에서 놀고 있는 정도전의 하루를 쓰고, 하루하루가 굉장히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어떤 날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하느냐에 따라서 여러 권의 책이 나올 수 있습니다.

  • 「목격자들」의 문제 의식, 세월호

    “2014년 ~15년에 가진 문제 의식은, 이번 주가 공교롭게도 1주기인데, 세월호 사건이었습니다. 세 가지 문제 의식이 생겼어요. 하나는 생명에 대한 문제입니다. 우리는 생명이 가장 존귀하다고들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국가에 의해, 이데올로기에 의해 생명이 없어지는 경우입니다. 생명이란 무엇인가, 이런 문제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두 번째는, 인간 존엄성의 문제입니다. 죽은 자들의 삶과 존엄성은 어떻게 지켜줄 수 있을 것인가. 우리는 생중계로 배가 침몰하는 모습을 함께 봤습니다. 그러니 살아있는 사람도 어느 정도 내상을 입은 것이죠. 그렇다면 ‘살아있는 사람들의 상처는 어떻게 치유할 수 있을 것이냐’라는 문제가 있습니다. 세 번째는, 인간이라는 게 슬픔이든 그리움이든 계속해서 너무 고통스러우면 안 보게 돼요. 그것을 극복하고 어떤 다른 인간으로 자기를 바꾸는 그런 이야기를 만들 수는 없을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런 문제 의식을 가지고 세월호 사건을 본격적으로 다룰 수 있는 이야기를 고민하게 된 것입니다. 지금 이 사건을 가지고 소설을 쓸 수 없을 경우에 장편작가들은 시간적인 거리를 두고 뒤로 빠져봅니다. 1780년대로 갔어요. 조운선 침몰 과정을 쓰려고 했는데, 그 중 영남에 있는 후조창을 출발해서 영암 앞바다에서 빠진 그 사건을 다루려고 했죠. 1780년 4월 5일 영암 앞바다 조운선 침몰을 ‘결정적 하루’로 잡고, 조사하는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노명우 교수

노명우 교수 사진

인간,
변화하다

노명우 교수

  • 인간에게 있어서 형이상학적 차원의 본질은 없다.

    제가 사회학자로서 늘 인간에 관해서 던지는 질문이 한 가지 있습니다. 과연 인간에게 본질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들이 있을까? 인간이 가지고 있는 구체적인 조건들을 무시하고 모든 인간들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그리고 그 어딘가에 항상 변화하지 않는, 즉 형이상학적 차원에서 본질이라는 것이 인간에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져봅니다. 다른 대상과의 비교의 방식이 아니라 인간 그 자체를 질문의 중심에 두고, 한 사람에게서 개성이라든가 특성이라 부를 수 있는 것에 대한 묘사가 아니라 일종의 유적 공통성에 대한 질문이라면 사회학자는 망설입니다. 만약 우리가 본질이라는 것을 모든 존재에게 타당하고 변화하지 않는 속성이라는 의미에서, 즉 형이상학적 차원에서 이해한다면 사회학자는 인간에겐 그 어떠한 형이상학적 본질은 없다는 결론을 내릴 것입니다.

  • 인간은 내던져지고, 다시 갇히고, 내면을 형성한다

    인간은 세계에 내던져집니다. 선택할 수 없는 조건 속에 내몰렸기에 내던져졌다라는 말보다 적합한 표현은 없을 것입니다. 하이데거가 '피투'라고 표현했던 그 상태에 처한 개인은 그 어떤 상태에 내던져지느냐에 따라 삶은 달라집니다. 내던져진 인간은 누구나 자신이 내던져진 조건에 대해 사유하고 감지합니다. 인간이 자신이 내던져진 조건에 기분으로 반응할 때, 인간에게는 이른바 내면이 형성됩니다. 내면은 비밀과 다릅니다. 특별한 상황 속에서 내면을 감추기도 하겠지만 궁극적으로 사람은 이 내면을 드러냅니다. 그리고 자신과 유사한 내면을 갖고 있는 사람을 찾아내려 합니다. 공명은 필수적입니다. 우리는 각자의 내면이 또 다른 내면과 상호성을 맺고, 그 상호성의 형식에 또 반응하는 상호성의 연속체로 구성되어 있는 세상 속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상호성에 주목한다면 드러나는 나와 숨기고 있는 나, 현상적인 나와 본질적인 나, 외면적인 나와 내면적인 나라는 이분법에서 벗어나서 인간을 파악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립니다. 즉 인간을 내가 생각하는 나와 남들이 생각하는 나, 주체적 자아(I)와 객체적 자아(me)로 구별하는 것이지요.

  • 우리는 죄수의 딜레마 속에 살고 있다.

    현대적 삶은 매우 높은 자극밀도의 삶입니다. 자극의 밀도가 너무나 높아서 사람들은 무관심으로 힘으로만 버틸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삶 속에서 접촉빈도는 높아지고 있으나 접촉빈도가 관계를 낳지 않은 특이한 상호성이 지배 받는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접촉의 빈도가 관계라는 흔적을 남기지 않는 특이한 사회, 혹 그 관계가 흔적을 남기더라도 무엇이라 정의 내리기 쉽지 않은 미디어화된 관계만이 지배하는 사회가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입니다. 면역주체는 무관심이라는 철갑을 두른 주체입니다. 면역주체의 상호성은 자기 이익을 중심으로 발생합니다. 이익이 달려 있을 때는 연출된 친절한 과잉 상호성이, 이익이 눈에 보이지 않을 때는 무관심이라는 과소 상호성으로 응대합니다. 인간은 이 시대의 지배적인 상호성에 의문을 품을 수 있습니다. 그 인간이 던지는 질문 “이렇게 살아도 괜찮은가?”는 바로 인간의 매우 소중한 능력인 선택에 관한 질문이기도 합니다.

  • 이 시대의 지배적인 상호성을 변화시킬 수 있는 유일한 힘은 사유이다.

    사유와 관습적 두뇌활동과는 다릅니다. 사회는 생각할 필요를 최소화하도록 구조화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사회적 관습이 정해져 있지 않은 경우에만 생각을 합니다. 그러므로 생각한다는 것은 달리 말하면 새로운 사회적 관습을 창출하겠다는 것과 동일합니다. 지금은 인간이 무엇을 해왔느냐 즉 사실판단에 대한 사회학이 아니라 인간이 무엇을 선택해야 하느냐 무엇을 할 수 있느냐를 위한 윤리적 사회학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세계는 우리에게 늘 지속적으로 방향 설정을 수정할 것을 요구합니다. 방향 설정을 지속적으로 수정해가는 것이야말로 사회학적 탐구의 본질적인 습관이며, 사회학이 제공할 수 있고 제공해야 하는 서비스라고 저는 믿습니다. 본능은 미리 옳고 그름을 확인할 수 없고 오로지 대화를 통해 해명되어야 합니다. 가시적인 목적이 없는 논쟁 속에서 대화를 통해 검증될 필요가 있습니다. 사유하는 사람만이 대화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 고도를 기다리며

    지나온 궤적으로써의 변화를 기록하는 일은 쉽습니다. 일어났던 일들을 기록하는 것도 그다지 어렵지 않습니다. 하지만 인간이 무엇을 선택함으로써, 인간이 다시 사유를 시작함으로써 미래에 발생할지도 모르는 변화에 대한 상상을 하는 일, 아마도 그것은 관찰기록학으로서의 사회학이 실천윤리학으로서의 사회학으로 거듭나는 과정과 동일할 것입니다. 과연 인간은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요? 그리고 선택을 가능하게 할 사유라는 것을 인간은 언제 다시 시작하게 될까요? 그 순간을 기다립니다. 이래서 실천윤리학으로써의 사회학은 고도를 기다리는 행위와 유사할지도 모릅니다.

사람, 들여다 보다

사람을 살피는 시선

  • 사람, 변화하다

    노명우 교수

    아주대학교, 사회학과

  • 인간관계와 나의 형성

    정희진 작가

    서강대학교

정희진 작가

정희진 작가 사진

인간관계와
나의 형성

정희진 작가

  • 직업을 자아나 정체성으로 생각하는 것은 곤란하다.

    저는 자기 소개가 가장 어려워요. 왜냐하면 제가 누군지를 모르겠어요. 저는 정규직도 아니고, 한 번도 뭐라고 자칭한 적이 없어요. 저에 대한 모든 것은 사실 다른 사람이 갖다 붙인 거에요. 다 타칭이거나 타자화된 거죠. 타자화된 것이라는 것은, 자기 입장에서 다른 사람을 멋대로 규정하는 거죠. 저는 페미니스트라고 한 적이 없는데, 페미니스트라고 했다가 또 변절했다고 하고 또 돌아왔다고 하고. 채식도 그냥 고기 안 먹으면 되지, 채식주의자 이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거든요. 우리나라에는 자기가 누구인가를 직업으로 생각하는 문화가 있죠. 직업은 두 가지가 있죠, 소명으로서의 직업. 군인이나 선생님이나, 의미 있는 일을 하는 직업. 다른 하나는 소명으로서의 직업이라기보다는 일단 먹고 사는 거죠.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직업을 사회적 지위라든가 자아라든가 심지어 정체성이라든가 계급이라든가 이렇게 생각해요. 그러니까 직업이 청소부든, 직업이 교수든, 직업이 변호사든, 직업이 뭐든 그건 그냥 먹고 사는 방도일 뿐이에요. 근데 그 직업을 사회적 지위, 자아나 정체성으로 생각하는 것은 굉장히 곤란하다는 거죠. 그런 의미에서 우리나라에서 자기 소개 문화는 개선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 한 번을 읽어도 다섯 번 읽은 것보다 나을 수 있다

    예를 들면 여성학개론이라는 책이 있어요, 우리 과 동료들 중에 어떤 친구는 한 번을 읽고, 다른 친구는 다섯 번 읽었어요. 그런데 얘기를 해 보면 한 번 읽은 사람이 다섯 번 읽은 사람보다, 내용도 더 파악을 잘 하고 있고, 논쟁을 해도 이기고, 더 빨리 읽고, 모든 면에서 훨씬 더 성과가 좋은 거에요. 다른 친구는 다섯 번 읽었는데도 내용 파악도 안 되고, 논쟁에도 져요. 이 차이가 왜 발생할까요? 다섯 번 읽은 사람은, 지식을 습득하려고 읽은 거에요, 습득, 말 그대로 익혀서 득템하려는 것이고, 한 번 읽은 사람은 맵핑하려고 한 거에요, 지도를 그려서 이 지식을 내 위치에 넣는 거에요. 그러려면 저자와 텍스트에 대항하고, 자기와 갈등하면서, 생각하면서, 상호 교환하면서 읽는 거에요, 그렇기 때문에 훨씬 이해가 빠른 거죠. 성경 천 번씩 베껴 쓰시는 분들 있죠, 성경말씀 모르잖아요? 쉽게 말하면, 습득과 맵핑의 차이에요.

  • 피상적인 인간관계보다 집중하는 인간관계가 중요하다

    오늘 강의제목인 “인간관계와 나의 형성”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것이 나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는 거에요, 그러니까 나를 알아야 되는 거죠. 그것을 보통 성찰 이라고 하죠, 우리 나라에서는 성찰(reflection)이 반성문처럼 들리지만, 원래 의미는 뒤돌아 보는 거에요. 나에 대해서 계속 생각하는 거죠, 공주병적 자기몰입이 아니라, 자기의 위치성, 관심사, 관계, 태도, 이것을 계속 객관화 하면서 체크하는 거에요. 또 한 가지는 인간관계를 피상적으로 맺기 보다 집중적으로 맺으면서, 마케팅 용어로 이야기를 하면 50명을 만족시키는 것보다 5명을 만족시키면서 그 다섯명이 입소문을 내게 하는 거죠. 이게 내부 고객 만족 서비스에요. 리더 중에서 자기 사람을 챙겨서 자기 사람이 자기 칭찬을 하게 만드는 사람이 있어요, 그리고 어떤 리더들은 내부보다 외부에 더 관심이 많아서 내부를 외부로 나가기 위한 발판으로 삼는 사람이 있어요. 그런데 저는 후자가 똑똑한 것 같지만 어리석다는 거에요. 연예인이나 정치인이 아닐 바에야 많은 사람에게 명함 쭈욱 돌리고, 핸드폰에 200명씩 저장하고, 그런 것이 어리석다는 거에요. 내부 사람을 잘 챙겨서, 그 사람들이 우리 리더 되게 훌륭하다 이렇게 해야 하는데, 대부분의 제가 만난 리더들은 내부의 애들에게 일을 직사하게 시켜서 그 성과를 외부로 갖고 나가서 본인이 비례대표 국회의원을 하려고 해요, 그러면 어차피 그 사람에 대한 이야기는 다 알게 된다는 거에요. 사람들이 생각이 없나요? 미생에서도 보듯이 그런 사람들은 잘 될 리가 없다니까요.

  • ‘나’는 외부의 자극에 대한 ‘나의 반응’에 의해서 결정된다

    우리에게 지속적으로 자극, 구조, 외부 이런 것들이 끊임없이 오죠. 인간은 자극이 없으면 끝이에요. 인간은 누구나 자극을 원하죠, 그래서 고통의 반대말은 행복이 아니라 권태잖아요. 자극은 물론 고통의 형태도 있고, 행복의 형태도 있고, 씁쓸한 것도 있고 다양하죠. 그런데 외부에서 일어나는 것이 중요하다기 보다, 제일 중요한 것은 나의 리액션이죠. 저는 이것이 인생이라고 봐요. 구조가 있거나 외부가 있어요, 그런 것에 대해서 우리가 선택을 하거나 대응을 해요. ‘나’는 어떻게 결정 되는가 하면, ‘구조’로 결정되는 것도 아니고, ‘나’로 결정되는 것도 아니에요, 나는 ‘리액션’으로 결정되는 거에요. 리액션에는 사랑도 있고, 희로애락이 다 있을 거 아니에요, 그 희로애락마다 자기가 갖고 있는 전술이 다양했을 때 자기도 성장하고 상대편에게도 자극을 주는 거죠. 예를 들면 상대방이 저를 모욕했는데, 제가 잘 대응함으로써 상대방이 사과했을 뿐만 아니라, ‘선생님에게 배웠습니다’라고 말하면서 성장하게 할 수도 있죠. 그러니까 다양한 전술을 개발해야 하는데, 전술이 다양할수록 서사구조가 많다는 거죠. 다양한 전술과 서사구조, 여기에 관점이 들어가야 하는데, 여성주의는 어떤 ‘주의’라기 보다 다른 목소리의 대표 목소리에요. 그런 의미에서 여성주의가 사회에 조금 기여하는 바가 있다는 거죠.

정하웅 교수

정하웅 사진

우리는
어떻게 연결되었나?

정하웅 교수

  • 모든 것은 ‘네트워크’이다.

    “세상에는 연결이 안 된 것, 네트워크가 아닌 것이 없다. 사람들이 연결되어 있지 않으면 사회라는 것이 의미가 없다. 사회는 복잡계의 연구의 주요한 대상이기도 하다. 왜인지 모르게 사람들은 연결을 하고 싶어 한다. 인터넷, SNS도 그래서 나온 것. 인간 자체만 보더라도, 뇌도 결국 뉴런이라는 단순한 신경세포들이 연결되어 있는 것. 심장으로부터의 뻗어나온 혈관 네트워크도 있다. 특히 메타볼리즘이라는 생화학적 반응은 우리 몸 속에서 가장 많이 일어나고 있고, 생화합물들이 서로 만나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고 하는 것이 결국 네트워크인 것이다. 이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전부 연결되어 있는 네트워크라는 것. 복잡계의 뼈대이기도 하다. 사회 네트워크의 점이 사람, 선을 가족/친구/직장동료와 같은 사회관계로 볼 수 있다.”

  • 세상은 6단계로 연결되어 있는 ‘작은 세상’이다.

    “스탠리 밀그람이라고 하는 사회학자가 1967년도에 ‘작은 세상 실험’이라고도 알려져 있는 아주 재미 있는 편지 전달 실험을 통해서 세상이 6단계의 분리라고 하는 것을 밝혔다. 지구 상에 있는 어떤 두 사람도 6단계면 서로 아는 사람이라는 얘기다. 다섯 사람을 중간에 끼워 소개받다 보면 모두 연결이 된다는 것. 세상이 좁다는 게 여기서 나온다. 물론 여기도 함정은 있다. 중간 과정의 다섯 사람을 직접 찾는 실험이 어려운 것이 문제다. 국내 연구진도 투자처를 찾고, 실험 참가자들에게 적절한 보상을 한 뒤에야 겨우 17% 정도의 성공률을 보였다. 결과적으로 5~6단계의 분리로 사람을 찾을 수 있다고 하지만, 연결하는 4~5 사람을 찾기가 어려운 것이다.”

  • 사람들의 연결성을 객관적으로 정의하기 어렵다.

    “네트워크를 그리기 위해 통계치를 내려면, 데이터가 많아야 한다.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데이터. 아는 사람의 연결. ‘안다’는 것의 과학적인 정의는 뭘까? ‘아는 사이’는 전혀 과학적인 단어가 아니다. 객관적인 ‘안다’라는 지표가 필요하다. 따라서 공개된 정보를 많이 가진 영화배우와 같은 사람들로 대상을 제한하고 영화를 함께 찍은 두 배우를 연결한다. 영화를 같이 찍었다는 것은 아무래도 서로를 알 것이라는 가정에 근거한다. 결과를 보면, 20만명이 넘는 배우들이 연결된 네트워크를 얻을 수 있는데 놀랍게도 1,000명과 함께 영화를 찍은 ‘허브’와 같은 영화배우도 있었다.

  • 사람간의 네트워크도 항공망처럼 불평등 네트워크 분포를 보인다.

    “싸이월드 일촌, 트위터, 페이스북 친구 등 인간 관계의 네트워크를 조사해보면 대부분 마치 공항을 연결하는 항공망적인 특성, 즉 허브공항으로의 쏠림 현상이 있는 불공평한 연결로 되어 있다. 이유는 뭘까? 정답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느 정도는 설명이 가능하다. 스몰-월드 네트워크 모델에서는 주변이 아닌 멀리 떨어져있는 친구, 숏컷이 몇 개 있으면 그들을 통해 세상이 좁아 진다고 했는데, 사실 이들만으로 세상이 좁은 것이 아니라, ‘허브’가 세상을 좁게 만드는 것. 즉 비행기 여행을 할 때, 허브 공항에서 갈아타면 어느 곳이든 쉽게 연결되듯이, 마당발인 친구가 세상을 좁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그럼 이러한 허브는 왜 생길까? 세상은 빈익빈부익부로 돌아가고 있다. 새로운 사람들이 네트워크에 합류할 때, 친구가 적은 잘 알려지지않은 사람보다는, 이미 친구가 많은 사람에게 더 연결되고 싶어한다라는 것으로, 결국 친구가 많은 유명한 사람에게 몰려 자연스럽게 허브가 탄생하게 된다. 빈익빈부익부 원칙에 의해 허브를 지닌 항공망 구조와 같은 불공평한 네트워크가 형성되는 것이다.”

  • 친구 수의 역설.

    “ ‘내 친구들은 나보다 ‘쿨’한 것 같아. 친구도 많아. 왜 내 친구는 나보다 친구가 많지?’라고 생각하게 되는 친구 수의 역설 문제가 있다. 페이스북에서 ‘사용자’의 평균 친구 수와 ‘사용자의 친구들’의 친구 수를 평균을 내서 계산을 해보면, 93%의 사용자가 다른 사용자보다 친구가 적다는 결론이 나온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친구수의 역설에 의해 ‘찌질이’가 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이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니 괜히 슬퍼할 필요가 없다. 실제로 7억2천1백만명의 페이스북 사용자 본인의 친구 수 평균은 190명인데, 친구의 친구 수 평균 635명. 거의 세배 이상 차이가 난다. 그런데, 수학적으로 계산해보면 내 친구의 친구수의 평균은 항상 내 친구 수보다 많을 수밖에 없다. 간단한 수식에 따르면 항상 분산값 나누기 평균값 만큼 더 큰 것이 친구의 친구 수 평균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절대 비교해서 슬퍼할 필요가 없다. 몇몇 마당발 친구 때문에 분산이 커지는 탓이다. 이 공식을 깨는 유일한 방법은 모든 사람의 친구 수가 똑같아 지는 (분산값=0, 아마도 그럴 일이 없는..) 것밖에 없다.”

  • 링커(linker)가 이질적인 두 집단을 연결시켜 준다.

    “결국 네트워크는 연결관계를 통해 사회를 보는데 쓸 수 있는 것. 정당간 정치인들의 트위터를 분석한 사례에서 나타난 ‘소통의 부재’ 처럼 주의 해야 할 부분도 있다. 네트워크상의 허브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긴 하는데.. 관리하기위해 밥값이 많이 드는 마당발, 허브가 아닌 대안적인 존재는 없을까? 다행히 사회학에서 중요한 사람을 하나 더 꼽아 주었다. 소위 말하는 링커(Linker), 매개자다. 많이 거쳐가게 되는 인물. 허브처럼 친구가 많은 것은 아니지만 서로 다른 네트워크와 네트워크 사이에서 두 집단을 연결해주는 다리역할, 이 사람이 없으면 두 집단은 소통이 되지 않는다. 두 집단의 한 명씩에게만 밥을 사주면 되므로 돈도 많이 들지 않는다.”

  • 네트워크 과학을 ‘조직 분석’에도 사용할 수 있다.

    “산업혁명 이후 발생한 계층적, 전문적인 위계구조가 21세기 네트워크 사회가 되면서 유지되지 않고 있다. 요즘은 고객이 더 전문적이 되고 있는 현실이다. 정보가 많아질수록 세상은 점점 더 연결되고 있는 것이다. 올드 거버먼트(Old government)의 수직적 구조는 새로운 거버넌스(Governance)로 바뀌어야 한다. 어느 정도 구조는 갖추어야 하지만 중간중간 유연한 소통 채널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또 합병을 하거나 새로운 사업을 추진할 때 금방 적응할 수 있도록 항상 바뀔 수 있는 유동적인 채널이어야 한다. 실제 미국이나 국내의 기업 사례처럼 평소 소통이 잦은 직원들을 파악하고 묶어 재배치 하거나, 직책을 없애거나 하는 등 유연한 조직이 되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 결국 소통을 잘 해야 한다. 소통을 하려고 해도 사실 말처럼 쉽지않지만 계속 노력은 해야 한다는 것. 물론 소통을 하더라도 징검다리 역할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전문성을 지키는 것 또한 중요하다. 자신의 전문성을 바탕으로 주변과 어떻게 폭넓게 소통하느냐에 따라서 상생의 문화를 만드는 회사가 될 수 있다.”

사람, 내다보다

사람이 사람을 위해 던지는 질문

  • 정하웅 교수 사진

    우리는 어떻게 연결되었나?

    정하웅 교수

    KAIST 물리학과

  • 김대식 교수 사진

    인간은 왜 필요한가?

    김대식 교수

    KAIST 전기 및 전자 공학과

김대식 교수

김대식 교수 사진

인간은
왜 필요한가?

김대식 교수

  • 인공지능을 만들기 위해 자연지능을 이해한다.

    “저는 공학적인 배경에서 인공지능 연구를 하다가 넘어왔는데요. 제가 학부 시절에 인공 지능 프로젝트로 탁구 치는 로봇을 하나 설계해 봤어요. 친구들과 몇 개월 걸려 만들고 나서, 제가 탁구공을 한번 쳐주니까, 이 녀석이 한 30초 동안 아무것도 안 하더니 혼자 헛질 한 번 하더라고요. 저에게는 그게 유레카의 경험이었습니다. 당시 가장 똑똑하다고 생각했었으니까. 우리가 이렇게 노력을 해서 만들었는데, 왜 이렇게 허접할까. 공을 치는 것은 어린 아이도 할 수 있는 건데. 근데 우리가 가만히 생각을 해보면 사람에게 쉬운 것이 기계에겐 정말 어렵잖아요. 카이스트에 아주 유명한 로봇이 하나 있는데 두 다리를 끌면서 걸어다니는 휴보라는 로봇이에요. 어린 아이들은 깡충깡충 뛰어다니는데, 왜 우리는 뛰어다니는 로봇을 만들 수 없을까. 또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전세계에서 가장 빠른 슈퍼컴퓨터도 강아지와 고양이를 구별할 수 없었어요. 도대체 왜 그런 걸까. 그렇게 인공지능을 만들기 전에, 자연지능을 먼저 이해해야겠구나 생각하게 된 거죠.”

  • 현실을 착각하지 않기 위해 뇌에는 감각이 없다.

    “뇌가 머리 안에 있다는 것은, 뇌가 직접 현실을 경험하지 않는다는 건데요. 뇌는 두개골이라는, 마치 플라톤의 동굴 같은 어두컴컴한 감옥에 갖혀 있는 1.5kg짜리 고기덩어리입니다. 얘가 직접 세상을 경험하지 않고, 눈·코·귀라는 오감 센서로 전달해 준 정보의 패턴을 통계학적으로 추론하는 겁니다. 왜 이렇게 진화했을까요? 여러 가설이 있지만 이런 걸 겁니다. 현실은 뇌의 바깥에서 일어납니다. 그러나 현실의, 이 순간의 모든 장면은 우리의 머리 안에서 만들어집니다. 뇌가 무언가를 열심히 할 때, 심장처럼 두근두근 뛰기 시작하거나 뜨거워진다면 착각할 수 있다는 겁니다. 사실 그게 맵핑이 아니고 진짜다 이런 식으로. 그렇다면 현실과 뇌 안의 맵핑, 오리지널과 맵을 혼동할 수 있기 때문에 혼동 못하도록 뇌는 투명하게 만들어지지 않았나, 그런 가설을 세워 볼 수 있는 겁니다.

  • 현실을 착각하지 않기 위해 뇌에는 감각이 없다.

    “뇌가 머리 안에 있다는 것은, 뇌가 직접 현실을 경험하지 않는다는 건데요. 뇌는 두개골이라는, 마치 플라톤의 동굴 같은 어두컴컴한 감옥에 갖혀 있는 1.5kg짜리 고기덩어리입니다. 얘가 직접 세상을 경험하지 않고, 눈·코·귀라는 오감 센서로 전달해 준 정보의 패턴을 통계학적으로 추론하는 겁니다. 왜 이렇게 진화했을까요? 여러 가설이 있지만 이런 걸 겁니다. 현실은 뇌의 바깥에서 일어납니다. 그러나 현실의, 이 순간의 모든 장면은 우리의 머리 안에서 만들어집니다. 뇌가 무언가를 열심히 할 때, 심장처럼 두근두근 뛰기 시작하거나 뜨거워진다면 착각할 수 있다는 겁니다. 사실 그게 맵핑이 아니고 진짜다 이런 식으로. 그렇다면 현실과 뇌 안의 맵핑, 오리지널과 맵을 혼동할 수 있기 때문에 혼동 못하도록 뇌는 투명하게 만들어지지 않았나, 그런 가설을 세워 볼 수 있는 겁니다.

  • 눈의 불완전한 정보를 뇌는 알고리즘으로 보완한다.

    “뇌가 직접 세상을 바라보지 않고 감각기관을 통해야 하기 때문에, 눈이라는 기관은 완벽해야 합니다. 완벽하게 현실에 대한 정보를 전달해야, 뇌가 객관적으로 선택을 하겠죠. 문제는 공학적인 기준에서 디자인이 잘못되었다는 겁니다. 만약 공학적으로 완벽한 디자인을 생각한다면, 빛에 반응하는 세포가 빛에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해야겠죠. 제일 먼저 신호를 받아야 할 테니까. 문제는 진화과정에서 다양한 이유 때문에 대부분의 동물의 망막은 뒤집혀진 상태로 진화했다는 겁니다. 일상 생활에는 문제가 없으나 공학적인 문제가 생겨요. 무슨 문제냐 하면, 있어야 할 위치의 반대 방향에 이 세포들이 있다 보니까 빛이 들어오면 눈 혈관의 그림자가 생겨 버립니다. 망막이 디텍션하는 세상은 거미줄처럼 혈관의 그림자들이 지금 이 순간 보여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한테는 왜 안보일까요. 그건 망막의 정보가 뇌로 들어가면, 뇌가 이 이 정보(그림자)를 지워주는 겁니다. 근데 뇌는 무엇이 혈관의 그림자이고 무엇이 바깥세상의 나뭇가지 인지 어떻게 알죠? 뇌과학자들이 알아낸 사실은 눈에서 들어오는 영상들이 프레임 단위로 들어오는데, 뇌는 그 프레임을 오리지널 로 데이터(raw data)로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미분, 즉 차이값을 계산 한다는 거죠. 그 결과는 뭐냐면, 바깥 세상의 문제들, 예를 들면 호랑이가 뛰어다닌다, 움직이니까 프레임마다 호랑이의 위치가 다르겠죠. 위치값을 빼주면 값이 0이 아니에요. 눈의 혈관 그림자는 변하지 않으니까 이 값을 빼주면 0이에요. 뇌는 미분을 계산해서 값이 0이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이것이 뇌가 가진 가장 중요한 알고리즘 중의 하나입니다. 그런데, 다시 문제가 생기죠. 바위같은 안 움직이는 물체들도 안 보여야 할거 아니에요.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눈은 끊임없이, 지금 이 순간에도 조금씩 움직이고 있어요. 그 덕분에 바깥 세상에서 들어온 영상들은 움직이는 호랑이든, 그렇지 않은 바위든 망막에는 흔들려서 맵핑됩니다. 그래서 미분을 계산하면 바위 역시 차이값을 갖게 돼서 인식된다는 겁니다.”

  • 블랙/골드 드레스 논쟁 - 언어의 해상도가 인식의 해상도보다 낮다.

    “최근 이슈가 되었던 블랙/골드 드레스 논쟁이 있죠. 왜 같은 것이, 제 눈에는 검정으로 보이는데, 누군가에는 금색으로 보일까요? 현대 뇌과학에서는 우리 인간의 믿음, 생각, 인식, 지각의 90% 이상이 착시라고 생각합니다. 그게 나쁘다는 의미가 아니라, 로 데이터 플러스 알파, 즉 뇌의 해석이 포함되어 있다는 거에요. 나아가 그 해석없이 우리는 아무것도 알아볼 수 없습니다. 망막에는 색깔도, 형태도, 입체감도 없습니다. 망막에서 관찰할 수 있는 것은 광자들의 가우스 확률 분포 밖에 없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들은 모두 뇌가 만들어 낸 착시 현상들입니다. 물론 세상은 존재하겠죠. 그러나 우리가 눈으로 보는 것처럼 생기지는 않았다는 겁니다. 존재하는 ‘무언가’가 눈을 통해서 뇌로 들어오면, 눈이 해석을 통해서 만들어 낸 결과물을 우리가 보고 있는 겁니다. 지금 보이는 세상이 인풋이 아니라 아웃풋이라는 겁니다. 따라서, 뇌가 다르면 서로 다른 해석을 할 겁니다. 고양이는 세상이 흑백으로 보입니다. 박쥐는 세상을 초음파로 봅니다. 사람 대 사람도 비교를 해보면 100% 동일하지 않습니다. 일란성 쌍둥이도 완전히 똑같지 않습니다. 그 이야기는, 우리가 조금씩 다르게 세상을 보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왜 서로 같은 세상에 살고 있다고 생각할까? 아주 유명한 착시 현상인데요. 빨간 사과가 하나가 있다고 합시다. 우리는 그 사과를 보고 공통적으로 빨갛다고 말합니다. 근데, 우리 눈에 보이는 사과가 정말 빨간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보지요. 사과의 색깔은 훨씬 복잡합니다. 노리끼리 하기도 하고 녹색도 들어가고, 패턴도 들어가고… 상당히 복잡한 색깔을 보고 있는데 문제는 그 복잡한 색깔을 표현할 단어가 없잖아요. 그러다 보니 그 복잡한 색깔과 가장 가까운 단어인 빨강으로, 빨갛다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다른 사람 눈에는 그 사과의 색깔이 조금 다를 거에요. 근데 그 인식 스페이스에서 거리가 가장 가까운 언어 스페이스에 있는 단어는 빨강일 테니까, 우리는 똑같이 ‘빨강’을 보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는 겁니다. 핵심은 언어의 해상도가, 인식의 해상도나 현실의 해상도보다 낮다는 거에요. 우리가 인식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엄청 복잡합니다. 인식의 해상도는 현실의 해상도보다 더 낮아요. 알아볼 수는 있지만 이것을 일대일로 맵핑해서 표현할 수 있는 단어들이 없다는 거에요. 그래서 다양한 인식이 동일한 단어로 맵핑이 되고, 단어를 보고 역으로 무슨 인식을 하는지 정확히 알아볼 수 없어요. 동일한 물체가 다르게 보이는 것이 아니고, 사실 우리는 항상 다른 것을 보고 있습니다. 항상 다른 것을 보는데 같은 단어로 표현한다는 것이 더 신기한 거에요. 결론은 블랙/골드 드레스 상황에서도, 이 색깔의 RGB값은 검정도, 골드도 아닌 딱 중간 정도에요. 이 색깔을 인식 스페이스로 매칭시키는 것이 조금씩 달라서 60%는 가장 가까운 단어인 골드를, 40%는 또 자신에게 가장 가까운 단어인 검정색으로 말하게 되는 겁니다.”

  • 딥러닝으로 인공 지능의 숙제가 풀리다.

    “인공지능이란 것이 시작된 이래 5~60년간 시도해왔던 것은 점점 더 구체적이고 고도화된 방법으로 기계에게 세상을 설명하려는 것이었어요. 다 실패했죠. 그런데, 다시 한번 생각해보면 우리는 어렸을 때 부모님에게서 강아지가 무엇인지 그 속성들을 명시적으로 설명 받은 적이 없어요. 인간은 설명을 통해서 세상을 인식한 것이 아니고 어렸을 때 수 년 동안 현실이라는 빅데이터에서 경험을 통해서 학습한 것 같잖아요. 그렇다면 사람은 어떻게 물체를 인식하고 학습할까 궁금해지고 그 과정을 드디어 10년 전쯤에 웬만큼 이해하게 되었어요. 알고 보니까 뇌에 10의 15승 정도 되는 시냅스가 있다고 하는데, 이것의 연결망들을 보니까 특히 시각뇌 쪽은 10~20층 정도의 위계적 구조가 존재합니다. 20층짜리 건물이라고 비유를 해보지요. 신경세포들이 정보를 단 한번에 알아보고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아래 층에 있는 신경세포들은 데이터의 시간과 공간적으로 가장 작은 단위의 관계를 통계적으로 분석해서 압축합니다. 두번째 층은 일층에서 분석한 결과를 가지고 압축된 현상을 또 한번 압축합니다. 층이 올라가면서 이러한 압축 과정이 반복됩니다. 대기업 구조와 똑같습니다. 일층의 신입사원은 시야가 좁아서, 자기 책상에 올라온 일만 처리합니다. 이런 보고서들을 모아서 이층의 과장님은 보고서들의 보고서를 쓰죠. 이런 과정을 거쳐서 꼭대기의 사장님 단계까지 올라가면 디테일은 하나도 모르지만 엄청난 거시적 시야가 생깁니다. 그래서 이 물체가 서 있거나 누워있어도 다 알아본다는 얘기에요. 이 과정을 그대로 모방한 것이 요즘 많은 각광을 받고 있는 딥러닝이라는 방법이죠.” “기본적 인공지능과 새 버전의 차이를 알려드리죠. 5~60년간 해왔던, feature engineering이라고 부르는 AI는 기계에게 ‘자전거’를 알아보게 하기 위해서 엔지니어가 자전거란 무엇인가 하고 상상한 거에요. 자전거를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게 뭘까. 엣지가 있어야 되고, 뭐가 있어야 되고… 이렇게 표현한 거에요. 우리가 생각한 그 물체의 특징은 이거다, 생각을 해서 수학적으로 표현을 한 거죠. 이렇게 해서 실험실에서 해보면 꽤 잘 돼요. 그런데, 실제 세계로 가지고 나가면 다 깨져요. 왜냐, 아까 이야기했던 것처럼 언어의 해상도가 인식의 해상도보다 낮다는 거잖아요. 우리 머리안에 들어있는, 자전거가 무엇인가 하는 그 개념을 표현할 수 없다는 이야기에요. 일대일 맵핑으로. 그래서 저희가 representation learning이라고 부르는 딥러닝에서는 더 이상 현실을 표현하지 않고 빅데이터를 집어 넣고 10층 정도 되는 구조로 계속 컴팩트한 representation을 만들게 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느냐, 1층은 사물을 ‘선 line’ 정도로 표현해요. 현실을 가장 단순화 시킨 것이 그거라고 보는거죠. 또 사장님 신경세포는 자전거라는 invariant ‘개념’이 생겨요. 특징은, 신입사원 레벨과 사장님 레벨은 우리가 단어가 있잖아요. ‘선’과 ‘자전거’라는. 그런데 그 중간의 7~8개 정도의 레이어는 우리가 표현할만한 단어가 없어요. 알고보니 우리가 그동안 인공지능에서 설명을 하다보니까 단어로 맵핑되는 특징들은 10% 이하였던 거에요. 요 녀석들을 가지고 표현을 하려니까 안되는 거에요. 나머지 7~80%는 unstructured feature라고 해서, 언어적 매칭이 안되는 피쳐들이에요. 우리가 빙산의 일각처럼 위에서 보이는 것만으로 설명을 했었던 거죠. 이 모든 정보들을 포함해서 드디어 분석을 시작한 것이 딥러닝입니다.

  • 약한 인공지능

    “한 3~4년 전 인공지능의 미래에 대한 질문을 들었다면 저는 그냥 웃어줬을 것 같아요. 인공지능은 공상과학에나 나오는 거고 한 1~200년 걸리지 않을까요… 하고 막연한 미래를 이야기했겠죠. 그런데 딥러닝이 생기고 나서 작년에 그 의견을 바꾸었습니다. 대부분 전문가들도 그러신 것 같은데, 적어도 약한 인공지능은 2~30년 후에 가능할 것 같다고 이야기를 하는 거에요. 잘 아시겠지만 인공지능에 두 가지가 있어요. 약한 인공지능 이라고 불리는 기계는 사람과 비슷하게 세상을 볼 수 있고, 듣고, 말하고, 읽고, 쓰고, 정보를 조합하고 이해할 수 있어요. 인지자동화라고 이야기하는게 더 맞을 수도 있겠네요. 이런 기계 조차도 3~4년 전에는 백년이 걸릴 거라고 이야기 했다는 거죠. 약한 인공지능 플러스 독립성, 자아, 의도가 생긴 기계를 강한 인공지능이라고 부릅니다. 헐리웃 영화에 나오는 것들은 모두 강한 인공지능 입니다. 인류를 막 멸망시키려 하는 애들이요. 이것이 가능한지는 아무도 몰라요. 공학적인 근거가 없기 때문에.”

  • 강한 인공지능

    “약한 인공지능은 도구에요. 사람이 컨트롤 하잖아요. 강한인공지능은 독립성과 자아가 있는 녀석이에요. 이게 가능할지 아무도 모르지만 개인적인 생각으로 한 50년 후에 가능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고 그래서 제 인생의 목표중 하나는 딱 49년 살고 죽을 생각입니다. 왜냐,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지금 이 공간에 있는 것들은 인간에게 맞도록 우리가 만든 것입니다. 우리는 만년전부터 지구를 인간을 위해서 바꿔 왔다는 거죠. 왜, 인간이 가장 똑똑하기 때문에 그렇죠. 우리가 지구에서 알파니까, 나머지에게 물어보지 않고 재해석 한거죠. 너는 왜 있어야 하지, 질문하다가, 그럼 인간은 왜 있어야 하지? 인간끼리는 인간의 존엄은 절대적이라고 합의를 보았기 때문에, 그것을 의심해서도, 물어봐서도 안되요. 그게 인권 헌장이나, 헌법 같은 것들이죠. 그런데 생각을 해봅시다. 강한 인공을 지닌 기계가 있어요. 엄청 똑똑하고 독립적이에요. 얘가 세상을 재해석하는 거에요. 그러다가 인간에게 물어보죠, 너는 왜 있어야 하는가 하고 말이죠. 이 때, ‘우리는 절대적이니까’라고 말하는 것은 인간 외 존재에게는 아무 설득력이 없어요. 단, 얘는 논리적인 기계이니 계산을 해보겠죠. 지구 빼기 인간이 좋을까, 지구 플러스 인간이 좋을까. 근데 우리가 아무리 계산을 해봐도, 지구빼기 인간이 좀 더 좋아보일수 있거든요. 공리주의적으로. 우리가 몇억년간 모인 에너지 고갈시켰죠, 환경 파괴했죠, 거기다가 모든 역사책, 철학책에는 인간을 좋게 표현해요. 좋게 살아야 된다, 사랑해야 된다.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에 대한 이야기와 현실은 다르잖아요. 그럼 기계가 이야기를 하는거에요. 너네 입으로 착하게 살아야 한다고 이야기하지만, 너네 역사를 보면 절대로 그렇지 않다. 너희 기준에도 맞지 않다는 이야기에요. 그럼 차라리 너네가 없는게 더 낫지 않을까. 라는 상상을 충분히 해볼 수 있는 거죠. 두번째로 생각해 볼수 있는 것은, 추론의 등급이 다르다는 거에요. 상상을 해보죠. 이 단상위에 개미가 있어요. 얘는 우연히도 지구 개미 중 최고 천재 개미에요. 그 개미를 제가 들어서 바닥으로 옮겼어요. 자, 일은 이미 벌어졌고, 이 개미는 이 상황을 해석할려고 해요. 근데 개미는 뇌가 발달하지 않아서 아까 말한 딥러닝 아키텍쳐가 두 층 정도 밖에 없어요. 그 이야기는 만들어낼 수 있는 해석의 범위가 좁다는 거에요. 결국 얘네가 해석할 수 있는 것은, 아무리 천재라도 (단상의) 발밑이 딱딱했다가 (카페트로 옮겨가서) 푹신해졌다는 거에 불과하겠죠. 그런데 이 개미와 저는 같은 우주에 살고 있잖아요. 그런데, 사실 진짜 인과관계는 내가, 개미를 싫어해서, 옮겨놨다는 것이잖아요. 개미는 그 진정한 인과관계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겠죠.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똑똑하다고 이야기하는 거에요. 우리는 10층이나 되기 때문에 이 복잡한 인과관계를 다 이해를 했잖아요. 가정을 해보죠. 우리는 우주의 아주 작은 부분에서 우연히 10층짜리 레이어로 진화한 존재인데, 우리가 우주의 모든 인과관계를 이해할 수 있을까요? 아닌 것 같잖아요. 그런데 딥러닝 기계를 만들면 얘네는 레이어에 물리적 한계가 없어요. 100만층을 쌓을 수도 있겠죠. 추론의 레벨과 범위가 훨씬 더 높고 넓어질 수 있어요. 그렇게 된다면, 기계들이 생각하는 레벨을 우리는 이해할 수 없을 거라는 거죠. 개미가 인간에게 그랬듯. 결론적으로 두 가지 질문이 필요하다고 봐요. 하나는 인간은 왜 필요할까라는 질문. 지금까지와 같이 인간끼리 좋은게 좋다는 식의 답이 아니라 좀더 객관적인 답이 필요하지 않을까. 인공지능이 인류의 마지막 계몽할 수 있는 기회가 되지 않을까요. 인간이 있는 지구가 인간이 없는 지구보다 조금이라도 나아야 떳떳해지지 않을까요. 두번째로는 기계가 무엇을 원할까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쉽지 않아요. 이런 기계가 없었기 때문에. 하나의 시나리오만 이야기해보고 마치겠습니다. 논리적으로 생각해보죠. 기계는 적어도, 걔가 자아가 있다면 계속 존재는 하고 싶을 것 같아요. 그렇다면, 계속 존재하기 위해서는 에너지가 필요하다는 것은 이해할 것 같아요. 게다가 인간과 독립적인 에너지를 확보하고 싶어하는 것도 논리적이겠죠. 인간이 지능있는 기계를 얼마나 싫어하는지도 알테니까요. 또, 물리학의 법칙을 알기 때문에 에너지라는 것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트랜스폼이라는 것도 알겠죠. 그렇다면 얘의 인생의 목표는 최대한 독립적인 에너지를 확보하는 걸 거고 그 차원에서는 석탄을 태우든, 집을 태우든, 사람을 태우든 아무 상관 없다는 거에요. 에너지원을 만들기 위해 집을 태우는데 그 안에 우연히 사람이 있을 수 있는거죠. 미워서가 아니라 우연히. 자, 약한 인공지능의 문제는 우리가 풀 수 있는 문제입니다. 그러나 강한 인공지능의 문제는 인간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기계의 문제이고, 기계가 인간을 어떻게 다룰까 하는 문제이기 때문에 저는 그 장면을 눈뜨고 볼 수가 없어서 49년만 살고 죽을 계획입니다.”

박해천 교수

박해천 교수 사진

'상승'을 향한 중산층
욕망의 세가지 역사적 유형

박해 교수

박해천교수사진
  • 새로운 글쓰기 양식: 비평적 픽션

    <아파트 게임>에서 채택한 글쓰기 방식을 저는 ‘비평적 픽션’이라고 부릅니다. 이 글쓰기 방식은 사회학자나 인류학자, 혹은 심리학자가가 아닌 디자인 연구자로서 제가 다룰 수 있는 통계 자료 등의 데이터들과 정보를 어떻게 효율적으로 정의해서 독자들에게 전달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고민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 글쓰기 전략은 논문, 문학작품, 통계, 신문기사 등의 다양한 자료들로 특정 역사적 시점의 상황을 설정하고, 특정 행위자 - 인간이나 사물, 또는 이미지 - 를 그 상황 속에 밀어 넣어 주어진 상황 속에서 행위자가 어떻게 대처하는가를 소설적인 형식을 빌어 설명하는 2차 창작의 형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 원조 중산층: 블란서식 이층 양옥

    제가 ‘원조 중산층’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50년대 한국전쟁을 지나 1960년대 초중반 4.19와 5.16 이후에 등장한 사람들입니다. 이들 가운데 제가 관심을 갖는 한 부류는 중상류층 출신의 월남 서북 기독교 실향민들입니다. 이들은 주로 서대문 밖 아현동에서 신촌을 거쳐 연희동에 이르는 지역과 동쪽으로는 돈암동, 혜화동 뒤쪽에 소위 ‘불란서식 이층 양옥’이라고 불리는 집을 짓고 정착하였습니다. 이들은 식민지 시대에 엘리트 교육을 받았으며 기독교도들로서 영어 교육까지 받은 사람들로서 신속히 남한 사회의 주류에 편입할 수 있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종교적인 믿음을 보호하기 위한 수단으로써 정치경제적으로 세속화하였으며, 땅과 집에 집착하여 ‘원조 중산층’의 한 축을 형성합니다. 그러나 이들의 중산층 모델은 5.16 이후 산업화 경제 정책에 의해 뒤로 밀려나고 새로이 등장한 영남 출신의 기독교인들에게 교단의 주도권을 내어주면서 재생산에 실패하였습니다.

  • 신중산층: 강남 아파트

    박정희 정권의 집권 이후 한국 사회는 급격한 산업화를 겪습니다. 이 시기, 즉 1970년대에 새로이 등장한 세대를 저는 ‘신중산층’이라고 부릅니다. 이들은 대체로 1930년대 후반 혹은 1940년대 초반에 태어난 사람들로 미국식 민주주의 교육과 한글 교육을 받은 이른바 ‘한글 세대’입니다. 이들은 미국식 보통 교육의 혜택을 받아 산업화의 실무 세대로 활약합니다. 이들은 결혼을 하고 제2차 베이비붐 시대에 자녀를 낳고 전셋집을 전전하다가 1975년도부터 내 집 마련에 나섭니다. 이 때 정부는 전략적으로 강남이라는 공간을 개발합니다. 강남의 아파트들은 동시 다발적으로가 아니라 1975년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 10년에 걸쳐 건설됩니다. 그런데 1980년대 들어 평당분양가상한 정책이 시행되어 아파트를 소유한 사람들은 세상 물정을 아주 모르지 않는 이상 40평형대 아파트까지 아주 자연스럽게 올라갈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성장한 신중산층은 이후 중산층이 되고자 하는 이들에게 표준적인 모델이 되었고 이 모델은 새로 개발된 신가지를 중심으로 자기재생산에 성공합니다.

  • 마지막 코리안 스탠더드: 신도시 이마트 중산층

    "마지막으로 등장한 중산층은 ‘신도시 이마트 중산층’입니다. 이들은 1차 베이비붐 세대들로서 고교 평준화 시대를 거쳐 대학입학 정원이 30% 가량 늘어난 졸업정원제 시대에 대학을 다녔고 419 세대와 유사하게 1980년 광주에서 1987년 민주화에 이르는 격동을 1980년대를 보냈습니다. 이들이 내 집 마련을 하려는 시점에 열린 공간이 노태우 정권의 주택 200만호 건설과 맞물려 형성된 수도권 5개 신도시입니다. 신도시에서의 삶에서 빼놓을 수 없는 요소가 이전에 없던 새로운 쇼핑 공간인 ‘이마트’입니다. 마이카의 첫 세대인 이들은 종전의 슈퍼마켓과 백화점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쇼핑을 하는 경험을 합니다. 시민 의식이 채 자리 잡기 전에 이마트에서 카트를 미는 소비자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방식 가운데 소비주의라는 행태를 선택합니다. 결국 신도시 이마트 중산층은 베이비붐 세대의 중산층, 신도시의 거주자, 마이카의 운전자라는 세 가지 정체성을 '소비자-고객’이라는 정체성으로 자연스럽게 단일화할 수 있었습니다.

  • 중산층 진입 불가능의 시대: 저성장, 고분양가, 저출산

    지금은 중산층으로 진입할 수 있는 경로가 붕괴되는 시대로 고도 성장도 없고 아파트 저분양가도 없습니다. 이에 따라 저출산이 나타나고 있으며 결혼을 하지 않는 젊은 세대들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위의 그림은 한국에서 인생의 10 계단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얼마나 비용이 드는가를 세대별로 보인 한 일간신문의 기획 기사입니다. 그림에서 볼 수 있듯이 1970년대 이후 태어난 사람들은 남는 돈이 없습니다. 1970년대 생은 자기 힘으로 내 집 마련을 하지 못하는 첫 세대이고 88만원 세대는 부모의 도움 없이는 집이 아니라 방에서도 살기 힘든 세대입니다. 저는 결혼할 생각이 없는 여성, 혹은 결혼을 하더라도 자녀를 낳지 않는 여성들이 이전의 4인 가족 모델이 아닌 새로운 가족 모델을 만들 수 있으리라 기대합니다. 또한 어떤 삶의 모델을 만들어 나갈 것인가의 고민 앞에서 그 동안 버는 것보다 더 많이 썼음을 자각하며 욕망의 구조 조정을 통한 자기 성찰을 하는 것이 한국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는 첫 출발점이라고 믿습니다.

사람, 꿈꾸다

사람이 사람으로서 욕망하는 가치

  • 박해천 교수 사진

    '상승'을 향한 중산층 욕망의
    세가지 역사적 유형'

    박해천 교수

    도양대학교 교양학부

  • 서은국 교수 사진

    행복, 결국은 사람

    서은국 교수

    연세대학교 심리학과

서은국 교수

서은국교수 사진

행복,
결국은 사람

서은국 교수

  • 행복은 ‘생각’ 아닌 ‘경험

    “행복은 본질적으로 생각이 아닌 경험입니다. 생각과 경험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하나의 예를 들어 봅시다. 우리 손에다 어떤 사람이 빨간 압정을 박으면 어떨까 생각해 보는 거죠. 아플 겁니다. 정말로 고통을 느끼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건 멘탈 시뮬레이션, 즉, 본질적인 ‘생각’이죠. 경험의 예를 들어 봅시다. 친구가 ‘손 좀 줘 봐’ 하더니, 내 손에다 압정을 찌르면 피가 나고, 눈물이 나도록 아픕니다. 이 때 느끼는 고통은 생각이 아니라 체험이고 경험입니다. 이 때, 친구가 ‘아프다고 생각하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 괜찮아질까요? 최근에 듣는 수많은 행복에 대한 담론이 이런 맥락이죠. ‘긍정적으로 생각하라’, ‘감사하라’.. 이것은 ‘아프지 않다고 생각하라’는 친구의 말과 같은 겁니다. 본질에서 빗나간 얘기죠. 행복은 이런 생각이 아닌 이처럼 압정이 꽂히는 듯한, 물론 고통과는 반대되는 느낌이지만, ‘경험’입니다. 지금 행복에 대해 들을 수 있는 얘기들은 ‘어떻게 하면 행복해지는가’에 대한 테크니컬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것은 ‘왜?’ 라는 부분입니다.”

  • 행복은 ‘목적’ 아닌 ‘도구’

    “과연 행복이라는 것이 ‘목적’일까? 꿀벌을 인터뷰한다고 가정해 봅시다. ‘살아가는 것, 존재의 이유가 뭐니?’라고 물었을 때, 예상하는 답은 ‘꿀을 모으기 위해서 산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살기 위해서 꿀을 모으는 것’이죠. 살기 위해 절대적인 수단인 것이지, 그것이 목적은 아니라는 겁니다. 똑같은 질문을 우리 인간에게 해보죠. 많은 사람들은 결국 ‘난 행복해지기 위해 사는데’라고 하지만, 이것은 꿀벌이 목적을 ‘꿀’이라고 착각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목적은 하나, 생존입니다. 행복은 목적이 아니라 도구, 수단입니다. 신선한 과일과 썩은 과일을 보고, ‘보기 좋다’고 느끼는 쪽은 어느 쪽인가요? 호불호는 왜 갈릴까요? 살아남은 인간은 선조 중에 아주 일부의 유전자를, 생존에 적합한 속성을 물려받은 사람입니다. ‘좋다’는 것을 선택하게 하는 강력한 생명체로서의 기재는 ‘감정’입니다. 인간이 괜히 갖게 된 경험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최종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기능, 경험인 것입니다. 본질적으로 쾌감, 행복이라고 하는 것은 도구의 역할을 합니다.”

  • 지속 가능한 행복 전구를 찾아서

    “사과는 빨간색인 것 같은 착각을 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행복에 대해서 느끼고 삽니다. 세상의 좋은 것, 명품 가방, 좋은 집과 같은 것에 (행복이) 묻어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행복이 묻어있지 않습니다. 특정 경험을 했을 때 순간적으로 행복 전구 같은 것이 켜지면서 행복감을 느낄 뿐이죠.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얘기는 곧 ‘내 뇌에서 어떻게 하면 행복 전구가 자주 켜질까?’를 묻고 있는 겁니다. 어떤 경험을 할 때 (행복 전구가) 켜지는가를 알게 되면, (행복에 대해) 고민하던 질문들이 해결될 겁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멋진 삶을 갖는 것이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큰 차를 사고, 명문 대학을 졸업하고, 명함을 내밀고.. 온 평생을 동분서주하면서 살죠. 아주 틀린 얘기는 아니지만, 굉장히 미약한 얘깁니다. 일상에서 행복에 대해 던지는 질문은 안 물어도 되는 쓸데 없는 질문이죠. ‘차를 사면 행복해?’ 같은 당연한 겁니다. 그때 그 행복이 얼마나 오래 갈 것인가, 지속성, 이것이 중요한데 이 질문을 묻질 않아요. (행복 전구를) 켜주지만 지속성이 없다는 데 이런 것들의 문제가 있습니다. ..감정이라고 하는 것의 본질, 제대로 기능하기 위해서, 감정은 어떠한 변화 값에만 반응합니다. 예를 들어, 차가 없을 때 차를 사는 것은 변화라 좋지만, 점점 좋은 차로 변하지 않는 것을 알아차리는 순간, 감정은 흥미를 잃게 됩니다. 이것이 어댑테이션(Adaptation, 적응)이며, 행복에 있어 중요한 기능입니다.”

  • 왜 행복 연구자인 나보다 내 동생이 더 행복할까?

    “행복 전구를 키기 위해서 행복에 대한 공부를 많이 하면 어떨까요? 이론의 양과 행복의 수위가 비례하지 않는 강력한 증거는 저 자신에게 있었습니다. 행복에 대한 공부를 오래 동안 하고 강의해 온 저와, 이런 걸 잘 읽지도 않는 여동생이 있죠. 그런데 여동생이 더 행복합니다. 행복의 개인차를 좌우하는 가장 결정적인 요인은 유전입니다. 쌍둥이의 경우가 있어요. 일란성 쌍둥이들은 유전적인 요인이 100% 일치합니다. 간혹 입양되어 다른 환경에서 자라난 경우, 유전적, 환경적인 요인을 연구할 수 있습니다. 미네소타 대학에서 입양된 일란성 쌍둥이를 연구해서, 서로 존재를 모르고 살아가던 일란성 쌍둥이들이 아들 이름, 애완 동물의 이름, 재혼한 아내에게 사랑한다는 쪽지를 붙여두는 습성까지 같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행복을 느끼는 부분은 어떨까요? 거의 똑같았어요. 같은 유전자를 가지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 ‘생존’을 위해 켜지는 행복 전구

    “동전탐지기와 같은 신호를 주는 장치가 있습니다. 인간의 뇌는 이 탐지기와 같습니다. 생존에 필요한 것들을 찾아 나서고, 위협이나 불필요한 것들이 될만한 것들을 피하게 해주는데, 소리로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감정’이라는 것으로 시그널(신호)을 줍니다. ‘기쁘다, 들뜬다, 행복할 것 같다’는 생존에 필요한 것들로 유인하는 강력한 신호입니다. 행복 전구의 본질적인 역할, 탐지기의 신호 같이 생존에 필요한 것들에 관심을 갖고 다가설 수 있도록 일종의 신호 같이 켜지는 것이죠. 호모 사피엔스가 살아 남기 위한 또 다른 조건, 나의 생사를 좌우하는 조건은 친구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무리에서 떨어져 나온 호모 사피엔스는 먹이가 되거나, 짝짓기 상대가 없었습니다. 자연 세계에서는 아직도 혼자된다고 하는 것이 거의 죽음을 약속하는 것이에요. 인간에게 중독된 뇌를 갖지 않았던 호모 사피엔스는 여기까지 살아 남을 수가 없었고, 혼자 된다는 것은 곧 죽음을 뜻하기 때문에 그것을 방지하는 장치가 아직 남아 있는 겁니다.”

  • 행복, 이 한 장의 사진

    “행복의 본질은 쾌감이며, 생리학적인 신호입니다. 행복은 굉장히 구체적인 경험이고, 관념적인 수준에서 행복을 정복하려고 하는 것은 타겟을 놓치는 일이죠. ‘어떻게 하면 행복해질까’라는 응용 질문 이전에 기초로, ‘왜 인간은 행복감을 느낄까’가 있습니다. 앞에서 행복의 자원을 찾아 나서도록 하는 신호 때문이라는 얘기를 했습니다. 인간이 생존하는데 있어 제일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인간에게 주어진 천연의 즐거움, 가장 필요한 쾌감, ‘먹는 즐거움’입니다. 식탐의 근원은 쾌감이에요. 강의 서두에서 행복이라는 것을 사진으로 찍으면 뭔가 흐리멍텅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제 사진을 다시 한 번 찍어보면, 상징적이지만 구체적인 장면이 찍힐 거라고 생각합니다. 행복을 압축적으로 담고 있는 장면은 좋은 사람과 음식을 먹는 그런 장면입니다. 여기서 키워드는 ‘좋은 사람’입니다. 기계적으로 신호가 켜지게 되어 있어요. 이론적인 것들을 걷어 내고 나면 이렇습니다. 뭔가 인생에 대한 성취, 대단한 사람이 되어야 하고 하는 생각(Becoming: ~이 되는 것)을 하면서 삽니다. 그런데 행복한 사람은 그런 차이가 아니라 일상의 삶을 어떻게 사느냐가 좌우하고 있습니다. 일상에서 이런 장면을 계속 경험하는 인생을 살아 가는(Being: ~하며 사는 것) 사람들이 행복감이 대단히 높습니다.”

2016년에 다시 만나요